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프랑코 (문단 편집) === 권력장악 === || [[파일:Cara_al_Sol_Francisco_Franco_Bahamonde.jpg|width=100%]] || ||[[파일:external/spf.fotolog.com/1256590550529_f.jpg|width=100%]] || 당시 국민 진영의 유력한 장군들은 대부분 스페인 영내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프랑코는 아프리카 파견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스페인군은 사실상 아프리카 파견군을 제외하면 향토방위군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프랑코의 영향력은 반란 초기부터 가장 컸다. 게다가 그때까지 반공주의 외에는 다른 정치적 성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태도 때문에 프랑코는 국민 진영을 구성하던 여러 파벌들에게 가장 적절한 지도자로 비춰졌고, 여기에 그의 형 니콜라스 프랑코의 로비 활동이 결실을 맺어 1936년 10월 1일에 프랑코는 국민 진영의 본거지인 부르고스에서 총통(3군 총사령관(Generalísimo) 겸 국가수반)이 된다. 물론 국민 진영 내에서 프랑코의 경쟁자가 될만한 인물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본래 국민 진영의 우두머리가 될 예정이었던 호세 산후르호는 내전 발발 후 3일만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여기에 그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1937년 원인불명의 비행기 사고로 급사한다. 몰라 장군의 급사로 프랑코의 권력기반은 더욱 탄탄해진다.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왕초 노릇하던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내전 내내 프랑코에게 걸리적거리긴 했지만, 내전이 끝난 뒤 실권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쓸 수 없게 되었다. 군부 바깥의 정당 정치인으로 따져봐도 내전 이전 스페인 최대 우파 세력인 CEDA의 수장 호세 마히아 힐 로블레스는 총선 패배 이후 영향력이 거세되어 외국으로 망명했고, 왕당파 정당 스페인 혁신의 수장이자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호세 칼보 소텔로는 내전 직전 좌익 경찰대원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팔랑헤의 수장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화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상태가 모두 이러니 프랑코 한 사람에게 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랑코의 경쟁자 내지는 경쟁자 예비 후보들이 유독 비행기 사고로 많이 죽어 프랑코가 죽였다는 음모른이 돌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프랑코 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스페인 내전 동안 국민군이 사고로 잃은 군용기는 공화군에게 격추당한 군용기보다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는 비행 기술 자체가 새로운 기술이라 여러가지 기술적, 운용적인 측면에서 불안정했던 시대다.[* 이 당시 비행기 기술이 얼마나 불안정했던지, 동시대의 또다른 독재자 [[스탈린]]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딱 한 번. 그것도 [[테헤란 회담]]에 갈 때만 탔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군용 비행이 아직 기술적으로 불안정했던 시절 해군이 공화파 수병들에게 장악당했으니[* 지휘관들인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병들이 사살해 진압했다. 프랑코가 확보할 수 있었던 함선은 제한되었고, 위와 같은 이유로 반란군 장병들만으로 어찌저찌 항해해야 했으니, 정부군이 장교가 없고 제공권을 장악당해 못 쓰는 동안 반란군 역시 함선 장악에 실패하고 인원도 모자라 못 쓰는 처지였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신기술의 개척자가 되어야 했던게 스페인 국민파 진영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산후르호나 몰라 같은 스페인의 선구자들이 목숨으로 개척한 경험으로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프랑코의 원조 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축적된 항공 수송 기술을 잘 써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